커피·통조림·양담배·골프채… ‘거리의 PX’에 모여든 욕망들
커피·통조림·양담배·골프채… ‘거리의 PX’에 모여든 욕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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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한상엽
한국에 미군 PX(Post Exchange)가 처음 문을 연 때는 미군 진주(進駐) 한 달 후인 1945년 10월이었다. 군정청사(옛 조선총독부 청사) 31호실에 설치된 PX에는 치약, 면도날, 팬티, 셔츠 등 생필품부터 ‘럭키 스트라이크’ ‘카멜’ 같은 양담배, 커피·우유·통조림·껌·초콜릿 등 식료품, 당시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들었던 카메라·라디오·시계 등 고가의 사치품까지 다양한 외국산 물품들이 판매되었다. 이후 크고 작은 미군 PX가 전국 야전부대 주둔지 180여 곳에 추가로 설치되었다.
일제강점기 서울에는 일본 재벌 계열사 ‘미쓰코시’와 ‘조지아’, 박흥식의 ‘화신’ 등 ‘3대 백화점’이 각축을 벌였다. 해방서브프라임모기지동영상
이후 남대문통 조지아백화점은 한국인 종업원들이 군정청에 공탁금을 걸고 인수해 ‘중앙백화점’으로 개편했다. 그러나 1946년 5월 군정청은 계약을 파기하고 그 자리에 미군 PX를 설치했다. 500여 종업원들이 생존권을 요구하자, 그중 120여 명의 고용을 승계했다. 조지아백화점 자리에 설치된 대규모 미군 PX는 한국인들이 운영하던 백화점보다 훨씬 질 좋고 뱅크앤론
다양한 외국산 상품들을 판매했다.
서울 군정청에 설치된 24군단 장교 PX. /국사편찬위원회
미군 PX 상품들은 미군과 미군정 관계자들만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당수는 암시장으로 흘러나왔다. 미군 병사와 군정청햇살론카드연체
하위 직원이 소규모로 반출하기도 했지만, 고위직 인사가 대규모로 빼돌려 유통시킨 경우도 적지 않았다. 미군을 상대한 성매매 여성들이 주요한 공급원이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명동, 남대문시장 입구, 용산세무서 앞 등 서울에만 ‘양키 시장’, ‘코리안 PX’ 등으로 불리는 ‘야미(暗)시장’ 14곳이 번성했다(야미는 ‘암’의 일본어인데 당시는부동산담보대출한도
암시장보다 ‘야미시장’이라고 불렸다). 조선일보 해방 2주년 기념 연재 기사 ‘양풍진주(洋風進駐), 디시스 서울 코리아: 생활의 경연장 피엑스’(1947.8.16)는 서울의 명물, ‘거리의 PX’ 풍경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서울 거리 소개지(疏開地)에 열린 PX는 수효가 상당히 많지만 회현동 PX를 첫손 꼽을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마이너스통장 금리
동대문시장, 명동 거리 등등. 때와 물품에 따라 PX의 수효와 장소는 변동한다. MP(헌병)와 경관의 눈초리는 PX 변동의 ‘바로미터’이다. (…) PX는 평온한 때가 드물다. “바가지(MP 철모) 떴다!” 하는 신호 한마디가 들리면 초단파 무전보다도 빨리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전격적 철수 공작이 벌어진다. 양복과 셔츠를 책보에 싸 들고 넌지시 손님에게 ibk기업은행 적금
보여주던 육십 넘은 노파의 배가 순식간에 만삭된 것처럼 부풀어 오른다. 통조림 넣은 ‘륙색’(배낭)을 끈도 풀지 않고 내려놓고 손님을 기다리던 통조림 장수는 부리나케 륙색을 짊어지고 남산관사 모퉁이로 줄달음친다.
1947년 5월 미군 암시장 단속 압수품. 양담배, 통조림뿐만연희해드림
아니라 카메라, 영사기, 시계, 골프채 같은 고가의 사치품까지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
MP와 경관은 때로는 자동차와 트럭을 몰아 이곳을 습격한다. 트럭은 그물에 걸린 불행한 이들 ‘모리배’의 석유 궤짝과 담뱃갑을 빼앗고 그들을 붙들어 싣고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트럭이 경찰서 문 안으로 들어갈모네타계산기
때엔 붙잡힌 사람의 수효는 3분의 1만 남아 있다. 어느새 뛰어내려 버린 것이다. 게다가 남은 3분의 1이 가지고 온 석유 궤짝과 담뱃갑은 텅 비어 있다. 트럭이 인구 조밀한 회현동 골목길을 서서히 내려오는 사이에 민첩히 뒤따르는 동료들에게 담배와 통조림을 질질 흘려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검거 선풍이 불어도 10분 못 가서 PX는 다시 영업을 계속한바꿔드림론 서류
다.”
1947년 5월, 미군이 ‘거리의 PX’ 단속에서 압수한 물품 사진을 보면 양담배, 통조림뿐만 아니라 카메라, 영사기, 시계, 골프채 같은 고가의 사치품까지 등장한다. 외국산 사치품의 수입이 허용되지 않던 시절이던 만큼, ‘거리의 PX’는 백화점에서도 구할 수 없는 고가의 사치품을 매매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상품을 목보증인대출
제 석유 궤짝이나 배낭에 넣어 매매했지만 거래 규모는 엄청났다. 1948년 4월, 남대문시장 단속에서 헌병본부로 이송된 단속 물품만 트럭 2대 분량이었다. 소매치기와 협잡꾼이 들끓는 ‘거리의 PX’는 크고 작은 범죄의 온상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정식으로 유통되지 않던 의약품과 생필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고, 실업자들과 월남한 전재민(戰災民)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순기능도 없지 않았다.
미군정 3년 동안 백화점보다 더 번성한 미군 PX와 ‘거리의 PX’는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하고 500여 명 규모의 군사고문단만 남게 되면서 한동안 명맥만 유지되었다. 조지아백화점 자리에 운영되던 미군 PX도 한국 정부에 반환돼 ‘사회부 청사’로 사용되었고, 1960년대 이후에는 미도파백화점이 입점했다.
1953년 촬영된 미8군 PX. 동화백화점을 거쳐 신세계백화점 본점으로 이어진다. /신세계 그룹
6·25전쟁 발발과 함께 미군 PX는 부활했다. 부산, 대구 등 미군이 주둔한 도시에 차례로 대규모 PX가 들어섰고, 서울 수복 이후에는 명동 ‘미8군 PX’가 미쓰코시백화점을 승계한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들어섰다. 구직자에게 ‘미8군 PX’는 외국산 물품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일자리로 손꼽혔다.
서울대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박완서는 대학을 중퇴하고 미8군 PX에 취직했다. 누구나 선망하는 직장이어서 한편으로는 ‘취직하기 어려운 자리’였지만, 직원들이 상품을 빼돌리다 발각돼 수시로 해고되는 바람에 다른 한편으로는 결원을 충원하느라 ‘취직하기 쉬운 자리’이기도 했다. 서울대를 중퇴하고 PX 판매원이 되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저 집 이제 좀 살게 되었다”면서 박완서의 집을 부러워했다. 박완서는 그곳 ‘미8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하던 무명 화가 박수근을 알게 되었고, 20년 후 당시의 경험을 담은 ‘나목(裸木)’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6·25전쟁 정전협정 이후 미8군 PX는 동화백화점에 건물을 반납하고, 용산 미군 기지 안으로 이전했다. ‘거리의 PX’는 이후 서울 남대문시장과 부산 국제시장 등에 자리 잡아 ‘양키 시장’ ‘도깨비촌’ ‘도깨비시장’ ‘깡통시장’ 등으로 불리며 진화했다. 1950년대 정식 통관 절차를 거친 양담배, 커피, 양주는 거의 없었다. 그 기간 다방에서 팔린 커피, 고급 술집과 음식점에서 팔린 양주, 부유층이 피워댄 양담배는 대부분 미군 PX에서 빼돌려진 물품이거나 밀수품이었다.
1970년대까지 ‘양키 물자’를 암거래하는 상인과 세관 단속원의 ‘숨바꼭질’은 이어졌다. PX 물품 암거래는 1980년대 이후 ‘수입 자유화’가 확대되면서 점차 자취를 감췄다. ‘거리의 PX’는 양성화되어 오늘날까지 ‘남대문 수입 상가’ ‘국제시장 수입 상가’ ‘부평깡통시장’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참고 문헌>
박광명, ‘미군정기 경제통제정책의 시행과 암거래 실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01집, 2019
이동원, ‘한국전쟁 전후(前後) 미군의 PX 운영과 암시장의 진화’, 역사와 경계 제126집, 2023
이인행, ‘거리의 PX’, 대공일보, 1948.9.23~25.
‘양풍진주(洋風進駐), 디시스 서울 코리아’, 조선일보, 1947.8.15~22.